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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사회

개신교의 친일 성향과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

by 유쾌한 강회씨 2023.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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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는 어쩌다 친일과 보수팔이 기득권 적폐들의 앞잡이가 되었을까? 
나도 하나님을 믿고, 매주 주일 아침이면 어딘가를 가기 위해 분주했던 사람이었는데, 어느 순간 개신교도들의 선한 모습과 웃는 낯이 그리 친근하고 달갑지만은 않다.
개독교라는 멸시와 천대의 표현이 이제는 보통명사가 되어 가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개신교는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할 시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일제가 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건너 미국을 잡아먹겠다고 마음을 먹고 잔뜩 힘을 모으던 시기인 1930년대 말, 식민지였던 우리나라에 내려지던 일련의 식민지 관리 정책들은 한국 기독교계가 치르게 될 시험문제들이었다.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반만년 이상 내려져 오던 조선의 풍습과 문화, 언어와 표현들을 일본의 그것으로 바꿔 따르도록 강요하기 시작했고, 조선인의 신앙, 종교와 관계없이 일본의 신들을 기리는 신당에 절하기를 강요했다. 조선의 동쪽에 살아 있는 일왕에게 절을 강요하던 동방요배는 애교다. 


당시 조선 개신교는 일제의 요구에 강하게 저항하다 신자들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신사참배를 결의하게 되었다고 개신교 원로목사들은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로 부터 신앙을 이어받은 현재의 나이 든 목사들과 그들로 부터 다시 신앙을 이어 받은 MZ목사들 까지도 그렇게 알고 있다. 그때가 1936년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행보와 그 결의가 실제 일제의 강압에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는지, 아니면 일제가 패망하지 않으리란 확신에 살 궁리를 한 것인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개신교 목사들은 설교 때마다 신도들에게 "신사 참배는 국가적 의식의 하나이고, 우리는 '황국' 의 신민으로 마땅히 해야 하는 도리를 하는 것 이다'라고 설교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군의 승전을 기원하며 일본군 장병의 무사귀환을 위한 기도도 빠짐없는 예배 순서 중에 있었다고 한다.


개신교의 반민족적 친일 행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자발적으로 헌금을 모으고 이를 국방헌금이란 이름으로 일본군에 보낸 것도 모자라, 급기야 1942년엔 '조선장로호' 라고 명명한 전투기까지 일왕에 헌납 한다. 이러한 매국 행위는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앞장섰으며, 그들의 친일 행위는 이완용이나 노덕술, 백선엽이 혀를 내두르고 갈 지경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반민족적 행위와 종교적 결기를 깨트리는 반종교적 행위를 거부하며 끝까지 저항한 사람이 주기철목사님과 신양원목사님 등 일부뿐 이었다는 게 우리 개신교 역사의 민낯이다. 물론, 우리나라 개신교 전체 교단이 신사참배 할 때 유일하게 이를 거부했던 침례교 교단이 있기는 하다. 결국 침례교단은 일제로부터 교단이 폐쇄되었고, 그 여파가 현재 까지도 타 교단에 비해 가장 작은 교세를 유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일제의 이런 억압에 굴하지 않던 일부 목사들은 대부분 해방 전 고문과 옥고에 사망하게 된다.


하지만 친일 앞잡이 '백선엽'의 말처럼 그렇게 승승장구하며 영원할 것 같던 일제는 결국 1945년 패망하게 되고, 개신교는 속된 말로 좆 된다. 멘붕에 빠질 수밖에 없는 노릇 아닌가? 나라를 팔아먹은 것과 진배없는 짓을 했는데 과연 생존할 수 있을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나라를 팔아먹던 목사들 중 얍삽한 일부는 일본이나 중국 등지로 도망하였고, 그나마 양심있는 목사들은 목을 빼 놓고 처분만 기다리던 처지였다.


그런데, 상해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라던 이승만이 정권을 잡더니 서북청년단과 친일 찌꺼기 순사들을 이용해 '반민특위' 위원들을 살해 하고 해산을 시켜 버린다. 당시 반민특위가 잡아들인 친일파가 7천명에 이르니, 그들만 제대로 조졌어도 나라가 지금 이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해방 후 5년이 지나 6.25 민족상잔의 비극이 발생하고, 그렇게 우리의 관심은 반민 반역자 처단에서 전쟁에서 살아남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전쟁은 친일파들에겐 기회였다. 공을 세워 전쟁이 끝난 후 처단되지 않을 기회 말이다. 그 기회엔 개신교 친일파들도 대거 동승한다. 국민의힘과 개신교의 끈끈한 동지애 또는 철학의 합치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리고 그 때 한배를 탄 친일파 개신교 목사들로부터 학습받고 세례 받은 후세대 목사들이 현재 우리 교단의 원로 목사들이고, 그들에게 교육받은 목사들이 X세대 목사들이다. 

 

개신교 친일의 DNA는 그렇게 전수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많은 개신교인들이 유난히 반공과 친일에 친숙한 것이다.

 

하지만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일제의 강압에 신사참배 했던 카톨릭을 보자.

 

그들은 자신들의 신사참배 역사를 감추거나 외면하지 않고 철저히 공개하고 반성하며 기록에 남겼다. 그들 윗세대의 친일 행위에 대해 나라와 민족 앞에 사죄하며, 앞으로 두 번 다시 그러한 일이 반복되면 안 된다는 의지를 담아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위기 때 마다 외면하지 않고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그러한 모습은 나라와 민족에게 대해 카톨릭이라는 종교가 가지고 있는 부책의식의 발로 아닐까 생각한다.

 

종교란 본디 사회의 일원으로 사회 속에 자리잡고 있어야 하고, 그들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무의 무게도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 개신교가 사회 속에서 그러한 본분을 감당하기 위해선 과거 친일의 쓰라린 과오를 낱낱이 밝히고 사죄하며 회계하여 떳떳해야 하고 당당해 져야 할 것이다. 그것이 개신교가 개독교, 개독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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